윤집

윤집

  • 1606(선조 39)~1637(인조 15)
  • 조선 후기의 문신.
  • 본관은 남원. 자는 성백, 호는 임계.고산.현감 형갑의 아들이며, 남양부사 계의 아우이다.
  • 1627(인조 5) 22세에 생원이 되고 1631년(인조 9)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에 설서가 되었으며 1636년(인조 14)에 이조정랑.부교리에 이어 교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국왕과 조정 대신들이 남한산성으로 난을 피하였으나 청병에게 산성이 포위되어 정세가 극히 불리하게 되었다.
    최명길 등이 화의로 위기를 극복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때 오달제.홍익한 등과 함께 화친의 사신을 보내자고 주장하는 최명길의 목을 벨 것을 청하였으며, 최명길이 국왕의 뜻을 움직여 화친의 일을 성립시키고자 입대하여 승지와 사관을 물리치도록 청하자 이를 규탄하는 극렬한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에서 옛날 화친을 주장하여 사필의 베임을 피할 수 없었던 주회와 같은 대간도 감히 사관을 물리치지 못하였다고 극렬한 말로 규탄하는 한편, 국왕이 대연을 꺼리지 않고 오직 사특한 의논만을 옹호하고 간사한 신하만을 의지하면 마침내 나라를 잃어버리고 만다고 경고하였다.
    화의가 성립되자 청나라측에서 척화론자의 처단을 주장하니 그는 오달제와 더불어 소를 올려 자진하여 척화론자로 나섰다.
    청병에 의하여 끌려갈 때도 조금도 절개를 굽히지 아니하여 청병이 오히려 감복하여 존경하였다고 한다.
    청나라에서 고문과 회유 등으로 그의 뜻을 돌리려 하였으나 몸을 굽히는 굴복의 모욕은 죽는 것보다 도리어 더한 모욕이라며 끝내 굴하지 않고 항변하다 마침내 심양성 서문밖에 끌려가 사형당하였다.
    세상에서는 오달제.홍익한과 더불어 삼학사라고 이른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주 남한산성의 현절사, 강화의 충렬사, 평택의 포의사, 홍산의 창렬서원, 영천의 장엄서원, 고령의 운천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