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운휼

조운휼

  • 1332(충숙왕 복위 1)~1404(태종 4)
  •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 본관은 풍양. 평장사 맹(孟)의 31대손이다.
  • 이인복의 문인이며, 1357년(공민왕 6)에 문과에 급제하여 안동서기가 되고, 합문사인을 거쳐서 1363년에 2등공신이 되었다. 이듬해 국자감직강이 되었고 이어서 전라·서해·양광의 삼도안렴사를 지냈다.
    1374년 전법총랑으로 사직하고, 상주 노음산 기슭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석간누하옹이라고 하고 외출할 때는 반드시 소를 타고 다녔다.
    이때 <기우도찬>, <석간가>등의 시를 지었다. 1377년(우왕 3) 다시 등용되어서 판전교사사로 있다가 1380년에 사임하고, 광주 고원강촌(몽촌)으로 퇴거하였다. 그곳에서 판교원,사평원을 중건하여 원주가 되고 공사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다.
    은둔생활 8년째인 1388년(우왕 14) 전리판서로 기용되었고, 창왕이 즉위하자 서해도 도관찰사로 나가 왜구를 토벌하였다.
    그후 계림부윤, 강릉부사 등을 역임하는 동안 선정을 베풀었다.
    조선조 때 검교정당문학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퇴하고 고원강촌에 은거하여 지내다가 태종4년 73세로 자신의 묘지문을 손수 지어놓고 여생을 마쳤다.
    몽촌에 일거하면서 그는 밭에 나가 농사지어 생계를 유지하고 아정에 나가 강산풍월을 읊으며 소를 타고 가까운 곳에 있는 정금원, 광진원을 왕래하면서 행여들을 돌보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