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한

홍익한

  • 1586(선조 19)~1637(인조 15)
  • 오달제·윤집과 더불어 이른바 “병자 삼학사”의 한 사람.
  • 본관은 남양, 자는 백승, 호는 화포·운옹·찬성 숙의 현손으로, 진사 이성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김림의 딸이며, 백부인 교위 대성에게 입양되었다.
  • 이정구의 문인이다.
    1615년(광해군 7) 생원이 되고, 1624년(인조 2)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서를 거쳐, 1635년 성균관 장령이 되었다.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속국시하는 모욕적인 조건을 내걸고 사신을 보내오자, 상소하여 제호를 참칭한 죄를 문책하고 그 사신들을 죽임으로써 모욕을 씻자고 주장하였다.
    마침내 이 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미처 강화로 피난가지 못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그는 최명길 등의 화의론을 극구 반대하였는데, 이 난으로 그의 두 아들과 사위가 모두 적의 칼에 죽었고, 아내와 며느리는 적에게 붙들렸으나 몸을 깨끗이 보존하고자 자결하였으며, 늙은 어머니와 딸 하나만이 살아 남았다.
    이듬해 화의가 성립되었는데, 조약이 거론될 때, 김상헌·오달제·김집 등과 척화를 주장하였다.
    강화체결 이후 조정의 권유로 청군의 화를 피하기 위하여 평양부서윤으로 나갔으나, 청나라의 강요로 화친을 배척한 사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오달제.운집과 함께 청나라로 잡혀갔다.
    그곳에 붙들려갔어도 문초하던 청장 용골대에게 “작년 봄에 네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소를 올려 너의 머리를 베자고 청한 것은 나 한사람 뿐이다.” 하였고, 갖은 협박과 유혹에도 끝내 굽히지 않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그를 비롯한 삼학사가 살해된 정확한 날짜도 모르고 오래도록 감추어져 오다가 효종 때에 홍익한에게 도승지, 윤집에 부제학, 오달제에 좌승지를 추증하게 하였고, 숙종 19년(1663)에는 삼학사에게 영의정이 추증되어 그 절개를 기리게 되었다.
    광주의 현절사, 강화의 충렬사, 평택의 포의사, 홍산의 창렬서원, 부안의 도동서원, 영천의 잠엄서원, 고령의 운천서원, 평양의 서산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화포집>, <북행록>, <서정록>이 있다.
    시호는 충정이다.